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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에 시댁에서 제사를 지내게 된 유래-명절증후군,명절스트레스의 유래

황제0206 2020. 1. 25. 12:31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유교에서는 원래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명절에 차례를 <어동육서 홍동백서>를 따르면서 제사처럼 지내는 것은 유교의 풍습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제사를 필요이상 복잡하고 많이 지내게 된 유래는 조선 후기에 너도나도 양반임을 내세우기 위한 허례허식에 의해서라고 하는데요.



현재의 일부 유림들은 "명절 차례(茶禮)는 말 그대로 차(茶)나 술을 올리면서 드리는 간단한 예(禮)를 뜻한다. 이를 제사상과 혼동해 거나하게 차려내는 관습과 과시욕이 명절의 참된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다."고 하며 또한 명절노동을 여성에게만 시키거나 제사에 여성을 참여시키지 않는 세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명절은 줄거워야 하는데 현실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가부장적인 명절문화 때문인데 여성들은 불평등한 노동과 언어폭력 그리고 소외로 인해 상처를 입고 각종 갈등과 불화가 생기고 있으며 명절증후군은 여성질환으로 의학교과서에 등재될 수도 있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유학사상에 따르면 '나'는 공동체에 종속되거나 희생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며 온전한 '내'가 존재함으로써 공동체의 조화가 가능하다고 하는데, 해당 교리가 남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텐데 왜 이렇게 남성위주의 가부장제 제사문화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일까요?

일부 학자들은 고려말에 들어온 성리학을 기본으로 한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선택한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세력들이 왕에 대한 충성을 백성들로부터 이끌어 내기 위해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를 널리 전파했다고 주장하는데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여서 지금부터 설명을 드리려 합니다.

중국의 제사의 기원은 공자 이전, 하나라와 상 나라 때부터라고 하며 시황제는 천제, 즉 하나님꼐 드리는 제사를 드렸는데 그것이 왕의 조상제사로 발전이 되고 주나라 때에 유교사상이 정립되면서 제사의식의 기틀이 정립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조상제사도 지금처럼 죽은 사람을 위한 제사는 아니었고 부모를 높은 곳에 앉히고 제사 형식의 예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든 백성이 아니고 황제만이 지내던 제사를 제후들도 따라하게 되고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평민들도 자신의 신분을 높이기 위해서 너도나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는데 제사에 대한 이론이 정립된 것은 송나라 때에 주자학을 창안한 주희(주자)였다고 하며 이것이 우리나라에 도입이 되어 퇴계 이황에 의해 '성리학'으로 정립되고 아울러 제사법이 성행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도입된 제사가 당시 전 백성들에게 확산된 데는 부모에게 효를 다하게 하기 위함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다고 하는데 고려말에 쿠데타로 정권을 무력찬탈한 이성계가 당시 도덕성 문제로 민심이 이반되자 '무학대사'의 묘안으로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 온 백성들이 가능하면 많은 제사를 행하도록 권장했다는 겁니다.

제사상에는 대추와 밤 그리고 감이 필수적으로 포함되는데 대추는 씨가 하나라 임금은 하나라는 것을 뜻하고 밤은 한송이에 세개의 알맹이로 3정승을 둔다는 뜻이며 감은 씨앗이 6개라 육판서를 두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제사를 지낼 때마다 "홀로 하나이신 왕이시여! 삼정승, 육판서를 거느리시고 왕의 나가가 태평성대하게 하소서!"라고 기원하는 예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당시 조선초기의 왕권강화에도 도움이 된 제사를 통한 효(孝)와 충(忠)을 강조한 것이 현재에까지 유지되어 온 가부장제의 기원이기도 한데요. 가부장제는 유교정치의 근간입니다. 유교에서는 사회나 국가를 가정이 확대된 공동체로 봤으며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인 '효'가 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었던 겁니다. '효'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가부장인 아버지나 할아버지 혹은 맏형이 해당되며 나라의 가부장은 왕이므로 절대권력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 종묘에서 역대 조상에게 드리는 장엄한 제사는 왕권에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고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도 드릴 수 있게 되었는데 사실 주자학에 따르면 고조할아버지까지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신분은 3품 이상의 양반들에게만 허용이 되어 있었으며 일반 백성들은 부모의 제사만 드릴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아무나 고조할아버지의 제사까지 드리게 되면서 지금까지의 제사문화로 정착이 되어 온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여성들의 지위는 남성에 비해 크게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는 없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남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요. 조선 초기만 해도 남녀가 결혼하면 여자의 친정에 들어와서 사는 처가거주혼의 풍습이 있었는데 율곡 이이의 아버지도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친정에 함께 기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때는 여자와 남자를 태어나는 순서로 족보에 적고 유산도 남녀차별 없이 배분하였고 결혼을 하더라도 여자의 재산은 별도로 여자가 관리했으며 남편이 죽는 경우 여자는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재가를 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사회였다고 합니다. 

조선초기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적처 소생일 경우 장자, 차차, 딸의 성별 구별없이 모두에게 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 제사를 지내는 자식에 한해서 상속분의 5분의 1을 더해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남녀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문화가 고려말까지 유지되어 왔는데 고려말부터 도입된 유교의 교리를 정치적인 의도로 가부장적인 문화가 널리 퍼지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신분제 해체등을 요구하는 민심에 위협을 느낀 사대부들이 통치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제사 예법이 강화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하나의 권력이 되면서 여성들은 딸로서의 권리를 잃고 출가외인이라는 그늘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삼강오륜부터 칠거지악, 삼종지도 등의 사자성어들이 널리 퍼진 것도 결국 유교의 교리를 남성위주의 가부장제로 해석한 정치적인 의도였다고 보입니다.

여기에 일제강점기의 극심한 여성차별이 더해지면서 남녀차별이 사회에 고착이 되었고 오늘날의 이렇게 불합리한 가정문화로 정착이 된 것입니다. 




이상으로 오늘은 명절에 남편의 집에 가서 제사를 지내게 된 유래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최근에는 추석과 설 명절 중의 한번은 처가를 먼저 방문하는 가정도 있고 명절에 남녀의 노동을 균등하게 분배해서 하는 등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가정에서 명절때마다 부모와 자식간, 부부간의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성의 지위가 남자에 비해서 차이가 난 유래가 위정자들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초래된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왜곡된 기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 그 이전 몇배에 해당하는 긴 시간동안에는 너무나 당연한 남녀평등의 시대가 있었음을 이해하신다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즐거운 명절을 보내는데 도움이 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모두 즐거운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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